출구 없는 '권리금 대란'에 뿔난 서울 지하도상가 상인들

정병묵 2018. 8. 16.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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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점주들..입점 때 들인 돈 허공으로
상인들 "묵인하다 전면금지, 너무해"
서울시 "공공재산 개인 거래 안 돼"
타 지자체서도 서울 사례 주목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정병묵 경계영 기자] “장사도 안 되는데 권리금을 돌려받을 길은 없고…. 상가 임대차 계약이 끝나면 알거지로 나앉을 일만 남았네요.”

지난 13일 늦은 오후 서울 종각역 지하도상가는 한창 손님이 붐빌 시간인데도 폭염 때문인지 한산했다. 한 휴대폰 액세서리 판매점에서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점주에게 상가 권리금(보증금·임대료 외에 따로 붙는 웃돈) 문제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대뜸 핀잔이 날아왔다. 이 매장의 점주 김미자(가명)씨는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쓸 데 없는 걸 왜 물어보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폭염과 불경기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서울 지하도상가 점주들에게는 최근 무거운 짐이 하나 더 늘었다. 지난달 서울지역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 일부 개정안이 시행된 이후 서울시가 지난 20년간 허용했던 지하도상가 임차권 양수·양도(상인끼리 임차권을 사고 파는 것)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점포를 잘 운영해서 장사 잘 되는 곳으로 만든 데에 따른 일종의 보상 개념인 권리금. 상인들은 현재 지하도상가의 운영 주체인 서울시설공단과 기본 계약기간(5년) 및 사업비 회수기간에 따른 연장기간(1~5년)을 합쳐 6~10년간 계약을 맺고 장사를 하고 있다. 이번 서울시 조례 개정 전까지 상인들은 상가 임차권을 사고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임차권 거래가 전면 금지되면서 계약기간을 직접 채워야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20년 전부터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권리금을 내고 지금 점포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 돈을 회수할 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장사만 할 줄 알았지 권리금 못 돌려받을 줄 몰라”

‘한 말씀만 부탁드린다’는 요청을 계속 고사하던 김 사장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6년 전 가게 문을 열 때 열심히 장사해서 가게를 키운 다음 나중에 권리금을 올려받고 은퇴하는 꿈 하나 갖고 있었는데 올려받기는 커녕 이미 낸 권리금(7000만원)을 돌려받을 수도 없게 됐어요. 억울한 생각에 이대로 장사를 접을 수도 없어 막막할 따름입니다.”

지하도상가 점주들은 작년부터 서울시가 관련 조례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적잖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재산권이 침해됐다는 점은 둘째 치더라도 그간 상권을 일군 데 대한 기여도가 깡그리 무시당했다는 점에 분개하고 있다. 1984년부터 강남 지하도상가에서 옷장사를 한 이동윤(가명)씨는 “20년 넘게 땅 속에서 먼지 다 마시면서 장사했다. 강남역 지하도 상권을 키운 데는 우리 상인들의 노력도 분명히 있다”라면서 “그렇다면 서울시는 20년 전, 10년 전부터 아예 권리금 거래를 적극 금지했어야지 이제 와서 무슨 짓이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명동에서 안경점을 운영 중인 박재성(가명)씨는 “법도 최근 상가의 권리금 개념을 인정하고, 임차인의 권리금 회수 기회를 보호해주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데 시대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말했다.

현재 영등포 및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등 일부 지하도상가 연합회는 소송 등 단체 행동을 준비 중이지만 법적 절차를 밟더라도 승소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권리금이 계약서상에 명확히 명시된 경우가 없고 암암리에 주고 받는 돈이다 보니 증거가 충분치 않은데다, 지난한 소송 절차를 소상공인들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번질 가능성도 커졌다. 지역을 막론하고 지하도상가 권리금 문제를 건드리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서울시가 이 문제를 ‘해결’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서울시 조례 통과 후 시에 관련 문의를 하는 지자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하도상가 전대(轉貸·재임대)와 권리금 문제는 해결해도 욕을 먹고, 안 해도 욕을 먹는 사안인데 이번 서울시 조례 개정이 본보기가 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리감독 의무 소홀…피해 구제에 힘써야”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그러나 결국 계약서에도 제대로 명시가 안된 권리금을 상인들끼리 주고 받으면서 이번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의 부동산학과 교수는 “만약 지하도상가를 전면 리모델링해 없애고 다른 용도로 쓴다고 치자. 점주들에게 허용한 적도 없는 권리금을 운영 주체인 시가 물어줘야 하는 것이냐”라며 “여러 점주들을 거쳐 권리금이 이어져 오면서 결국 현재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 상황인데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권리금 개념이 합법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하도상가 임차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인들도 잘 알고 있다”며 “서울시의 공공재산이 사유재산처럼 운용되는 일을 이제서야 막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공재산 임차권 양수·양도가 정부 기준으로는 불법이지만 서울시 조례에서는 허용되는 ‘엇박자’ 상황이 오랜 기간 이어져 오면서 문제를 키웠기 때문에 정부나 서울시가 책임을 지고 조정기구를 통해 보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상혁 상가정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하도상가는 공공 재산이기 때문에 임차권 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맞다”면서도 “권리금 문제는 서울시가 오랜 세월 방치한 측면도 있는 만큼 권리금 실태 파악과 함께 적절한 피해 상인 구제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병묵 (honnez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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