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 때문에 쫓겨날 판”···강남 건물주들의 재개발 반대, 왜?

심윤지 기자 2024. 5. 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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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권 침해하는 재개발 정비사업 결사 반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반포1동의 노후 주택단지에는 이런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이곳에서 41년을 거주했다는 A씨 역시 스티커를 붙인 이들 중 하나다. 그는 주택공급 확대를 명목으로 한 정부의 재개발 규제 완화가 외부 투기 세력 유입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재개발에 적극적인 연립·다세대는 전체 동수의 20%도 안 됩니다. 대부분이 강남에서 신축 아파트를 받겠다며 투자 목적으로 유입된 외지인이고요. 그들 때문에 수 십년간 살던 원주민이 터전에서 밀려나야 하는게 말이 됩니까.”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반포1동의 노후 주택단지에는 “재산권 침해하는 재개발 정비사업 결사 반대”라고 적힌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심윤지 기자

서울 강남권의 핵심지인 반포1동에서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투자 목적으로 연립·다세대를 분양받은 외지인들은 재개발에 적극적인 반면, 월세 소득으로 노후 생계를 유지하는 원주민들은 재개발을 원치 않는다. 주택공급 확대를 명분으로 규제가 대폭 완화된 탓에 ‘주민들이 원치 않는 재개발’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8일 서초구청에 따르면, 반포1동 내 일부 토지 등 소유자는 지난달 9일 신속통합(신통)기획 재개발사업 후보지 동의서 연번 부여를 신청했다. 연번 부여는 재개발 사업 동의서에 일련 번호를 부여하는 것으로, 재개발 사업의 첫 단계다. 이들은 2022년 모아타운을 신청했다가 ‘주민 갈등’을 이유로 반려된 뒤 민간 재개발로 방향을 돌려 사업을 재추진하고 있다.

단독·다가구 등 통건물 소유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건물은 반포1동 내 전체 건물의 81%(424개동)에 달한다. 보유 토지 면적도 전체의 75%를 넘어선다. 하지만 건물 한 채를 한 명이 보유하다보니 인원으로 따지면 전체 소유자의 25%로 적은 편이다. 재개발 사업의 핵심인 ‘동의율’ 경쟁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다.

반포1동 곳곳에 있는 신축빌라. 상대적으로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신축빌라가 재개발에 동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심윤지 기자

현재 반포1동에서는 재개발에 우호적인 연립·다세대 가구만으로도 신통기획 후보지 신청(30%)은 물론 조합 설립(75%) 동의율 확보까지 가능하다. 신논현역과 논현역을 사이에 둔 더블역세권으로 반포자이를 맞은 편에 두고 있는 만큼 사업성도 높다. 그럼에도 재개발이 더뎠던 이유는 우후죽순 생겨난 신축빌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1·10대책’으로 재개발 노후도 요건이 67%에서 60%로 완화되자,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지막 장벽’까지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반포1동재건축반대비대위원회가 추산한 반포1구역의 노후도는 61% 수준이다. 이들은 노후도 1%포인트를 올리는데 약 1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추산한다. 정부의 노후도 규제 완화로 재개발 속도가 7년 정도 단축된 셈이다.

재건축에 반대하는 주민 B씨는 “접도율같은 전통적인 재개발 규제도 대폭 완화된 상태라 일부 통건물 소유자가 찬성으로 돌아서 토지면적 조건(50%)까지 충족하면 강제수용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주민 C씨는 “정부가 토지면적이나 노후도 기준을 언제 더 내릴지 몰라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노후 저층 주거지가 밀집한 반포1동의 모습. 심윤지 기자

주민들은 외지에서 유입된 투자자들이 재개발 추진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강남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다는 말에 비교적 소자본으로 신축 빌라를 분양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반포1동 연립·다세대 99동 중 지어진 지 30년 이상된 노후동은 20동(20%)에 불과하다.

주민 B씨는 “노후 주택에 사는 주민들이 생활 상의 불편을 느낄때는 당연히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맞다”면서도 “반포1동에 있는 연립다세대 건물의 80%는 지은지 오래되지 않은 멀쩡한 건물인데 강남 요지의 아파트를 챙기겠다고 부수자는건 국가적 낭비”라고 말했다.

이 지역 연립·다세대 시세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2022년 모아타운 공모시 동의서를 제출했던 A빌라의 전용면적 28㎡ 시세는 2021년 4억3000만원에서 2023년 6억500만원으로 2억원 가까이 올랐다.

국토부 관계자는 “규제 완화로 갭투기 세력이 유입되는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면서도 “재개발이 필요했음에도 사업 추진이 어려웠던 지역에서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초구청 관계자 역시 “투기 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주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시장 교란행위 발견 시 관계법령에 따라 대응할 예정”이라고 했다.


☞ 주민 갈등 커진 ‘모아타운’…투기 세력 의심되면 착공·건축허가 제한
     https://m.khan.co.kr/economy/real_estate/article/202403211115011#c2b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재건축과 달리 재개발 사업은 지난 몇 년간 규제완화가 트렌드였다”면서 “주택 공급 확대를 목적으로 사업 추진의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계속 풀다보니 재개발을 원치 않는 집주인들이 동네에서 밀려나는 ‘주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발생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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