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삶, 그리고 주거권] "쥐 없고 따뜻한 물 나오는 데 살고 싶어요" 소박한 소망

고승혁 기자 2017. 12.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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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 계층 정책 여전히 부족
아동·청소년 94만4000명
지하 등서 생활 ‘주거 빈곤’

최저소득 노인 4명 중 1명도
정부 지원 ‘사각지대’ 놓여

쪽방촌 철거 후 공공임대行
“월세는커녕 일세조차 내기
버거운데 현실 모르는 대책”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이영훈(가명·11)군의 소원은 소박했다. “쥐가 없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군은 공황장애로 몸이 아픈 엄마와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집에 살고 있다. 이곳에는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온수도 가스레인지도 쓸 수 없다. 지난해 LH전세임대아파트를 신청했는데 아파트 집주인의 자녀가 반대해 계약에 실패했다. 사회복지사는 어린 영훈이를 위해 시급히 주거지를 이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정부 지원은 없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한국도시연구소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최근 분석했다. 18세 미만 인구는 977만8000명인데 그중 94만4000명이 최저주거기준 미달 주택, 지하·옥탑방, 비닐하우스 등에 살고 있었다. 최저주거기준이란 ‘1인 가구는 주거면적 14m²에 방 1개’ 등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정해놓은 것이다. 한국 어린이·청소년 10명 중 1명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주거복지, 여전한 사각지대

정부가 그동안 발표한 주거 대책에는 청년·신혼부부·노인 등 무주택 서민을 위한 주택공급 방안과 금융지원책이 주로 담겼다. 돈을 조금 빌려주면 입주할 여력이 되는 이들이 정책의 타깃이 됐다. 전문가들은 ‘행복주택’처럼 특화된 주거정책이 속속 개발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한 정책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지난달 발표된 주거복지 로드맵에는 보호 대상 아동이 있는 가구에 전세임대주택 1000가구를 무상 공급한다는 내용이 담겼으나 주거빈곤 아동·청소년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청소년쉼터’ 출신 아이들의 주거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거론된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는 5년간 전세임대주택 지원이 가능하고 보증금도 최대 80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청소년쉼터 퇴소자에게는 아무 지원이 없다. ‘가출 청소년은 집에 가면 된다’는 인식이 이들의 주거권을 저해한다. 하지만 쉼터 출신 청소년의 68%는 가정폭력 등의 이유로 집에 돌아가기 어려운 상태다.

경제적 지원이 어렵다면 주거 확보에 필요한 부동산 교육이라도 해 달라고 이들은 말한다. 정문진 서울시립대 교수의 ‘쉼터 청소년 자립준비 경험 연구’에서 인터뷰에 응한 쉼터 출신 A씨(21·여)는 “사기당하지 않고 계약서 쓰는 법 등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최저소득층 노인 4명 중 1명은 정부 주거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월세 비중 확대에 대응한 주택임대정책 방향’ 보고서에서 월세 거주 노인 중 최저소득층(소득 1분위)은 27만4000가구인데, 이 중 공공임대주택과 주거급여 혜택을 받는 건 각각 9만6000가구와 10만5000가구에 그친다고 분석했다. 전체의 26.6%(7만3000가구)는 주거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송인호 KDI 연구위원은 “지방자치단체 한국토지주택공사 서민금융진흥원 등의 데이터를 통합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쪽방 없어지면 노숙해야…”

정부는 ‘쪽방촌’을 철거하고 거주자들이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월세는커녕 일세도 버거운 쪽방촌 주민 사이에선 현실을 모르는 대책이란 불만이 크다. 지난 2월 서울 남대문 쪽방촌에선 주민 10명을 상대로 심층인터뷰가 진행됐다. 한국도시연구원의 거주자 조사에 응한 양모(72·여)씨는 “임대주택에 들어갈 때 정부에서 700만원을 내주고 내가 300만원을 내야 한다는데 당장 그런 돈이 없다”고 했고, 박모(62·여)씨는 “쪽방이 없어지면 돈 없는 사람들은 노숙자밖에 안 된다”고 호소했다.

전문가 사이에선 쪽방촌을 철거하기보다 ‘준주택’으로 인정하고 생활환경 개선에 나서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한국도시연구원 관계자는 “정부가 쪽방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임대료를 낮추는 방안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나 독거노인은 단순히 ‘살 곳’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주거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신체 기능의 제약을 감안해 주택 개조와 생활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제까지 생각해야 한다. 정부는 주거복지 로드맵에서 65세 이상 노인에게 향후 5년간 5만 가구 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생활지원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는 건 4000가구에 불과하다.

장애인 주거 문제도 상황이 비슷하다. 국토연구원의 2015년 장애인 주거실태 조사를 보면 장애인가구의 월 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RIR)은 24.1%로 일반가구(20.3%)보다 높다. 주택을 개조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장애인 주택개조 지원 예산은 7억7000만원으로 405가구만 혜택을 보는 데 그쳤다.

이런 주거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선 정부가 적극적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김유진 경북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정부 의도와 달리 복지 현장에선 노인이 임대주택을 받았으면 생활 지원은 못 받는 등 전혀 다른 서비스가 ‘이중수혜’ 명목으로 중단된다”며“실질적인 복지 정책이 나오려면 현장의 소리를 듣고 반영할 창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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