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코노미] "차라리 당첨 안 됐더라면"..장기전세 안주하다 내집 마련 '물거품'

서기열 입력 2018. 4. 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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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 성공기(18)
이사 걱정 없는 장기전세 장점 많지만
안주하는 사이 내 집 마련은 요원해져
서울 은평뉴타운. 한경DB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공급한 장기전세주택(시프트)에서 8년째 살고 있는 A씨(38)는 올해 재계약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민간아파트 못지않은 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지만 이제는 집을 사고 싶어도 쉽지 않은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거에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데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란 장기전세주택 모토에 공감했던 터라 내집마련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주변 집값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버렸다. 8년 전에는 친구들이 그를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그가 과감하게 내집마련을 한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숲세권 새 아파트 1.5억에 거주 ‘환호’

A씨가 장기전세주택에 당첨됐던 순간은 극적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시작한 장기전세주택의 전세보증금은 주변 시세의 80% 수준으로 당시 적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무주택기간, 서울시 거주기간, 부양가족 수, 청약통장 가입기간 등을 기반으로 산정한 청약가점으로 당첨자를 뽑는 체계에서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로 높은 경쟁을 뚫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대학 재학시절 하숙집에서 살면서 전입신고를 해놓았기 때문에 무주택기간과 서울시거주기간, 청약통장 가입기간을 짧게나마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2010년 결혼을 앞두고 2009년부터 집중적으로 청약했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다.

기회는 찾아왔다. 2010년초 상암, 은평 등에서 대규모로 장기전세주택이 공급됐다. 가점이 낮은 A씨의 선택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낮을 것으로 판단되는 단지였다. 아파트 4개 단지 가운데 도심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단지에 청약해야 당첨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평뉴타운 3지구에 청약한 결과 상암 2개 단지와 은평 2개 단지 가운데 경쟁률이 가장 낮았다. 구파발역과 멀다는 단점이 있어 경쟁률은 1.3대 1에 그쳤다. 희망을 품었지만 최초 발표에서는 낮은 가점 때문에 탈락했다. 실망한 마음을 추스리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고 있던 중 SH공사로부터 미계약분에 추가로 당첨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신혼집 마련에 대한 고민이 싹 풀렸다. 무엇보다 가격이 매력적이었다. 전용면적 85㎡ 신축아파트의 전세가가 1억5200만원에 불과했다. 서울시 권역에서 1억원대로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공급 물량이 몰렸던 당시 은평뉴타운의 85㎡의 전세가는 2억원 가량이었고, 신혼부부들에게 인기있는 지역인 마포 공덕에서는 같은 면적 아파트의 전세가는 3억에 육박했다. 또래의 동료들은 신혼집 마련을 위해 부모님의 지원을 많이 받거나 무리한 대출을 받아야했지만 A씨는 자금 마련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사할 걱정 없이 최장 20년을 살 수 있는 데다 재계약시 보증금 인상 상한선이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구파발역에서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있는 새 아파트의 최신 시설과 은평뉴타운의 쾌적한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걸어서 북한산국립공원을 다닐 수 있는 ‘숲세권’의 매력도 컸다. 

은평뉴타운 장기전세주택. 한경DB


◆집값 상승에 뒤늦은 후회

비용부담을 덜고 이사갈 필요 없는 시프트의 편리함은 8년이 된 현재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그동안 A씨는 장기전세주택에 살면서 “집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랐으니 조만간 떨어질 것”이란 생각에 함몰됐다. 집을 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2030년까지 현재 살고 있는 장기전세주택에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2년마다 전세 보증금을 올려주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라는 비슷한 또래 친구들의 하소연은 남의 일이었다. 

8년 동안 서울의 집값은 크게 올랐지만 A씨가 살고 있는 장기전세주택의 전세가는 여전히 쌌다. 과도한 주거비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는 시프트의 취지에 맞춰 2년마다 재계약을 할 때 보증금 인상 폭은 연 5%로 제한됐다. 2010년 입주 후 2012년, 2014년, 2016년 세 차례 재계약을 했지만 현재 보증금은 1억7600만원가량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입주한 은평뉴타운 전용면적 84㎡ 아파트의 전세가(박석고개12단지, 4억8000만원)에 비하면 3억원가량 싼 수준이다. 마포구 공덕동의 비슷한 평형의 전세가는 5억을 넘나든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장기전세주택에 살면서 아낀 주거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해 재산을 불렸어야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집을 사는 순간 현재 살고 있는 장기전세주택에서 나와야 하는 제도의 특성상 내집 마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거비를 아낀 만큼 지출은 컸고 전세보증금을 제외하면 별다른 자산이 없는 상황이다. 

최근 아파트 가격 상승을 바라보며 A씨는 집을 사지 않았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2016년말 고등학교 친구들과 송년회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 대부분이 수억원씩 대출을 끼고 서울 왕십리, 금호동, 성남 분당 등에 집을 샀다고 했을 때 ‘미친 짓’이라고 혹평했다. 2년마다 이사 다녀야하는 번거로움과 전세가 급등을 온몸으로 느꼈던 친구들의 고충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A씨는 당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때도 이미 꼭지라고 생각했던 아파트 가격은 이후에도 계속 올라 친구들은 이미 수억원의 시세차익을 냈다. 

A씨는 지난해 하반기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집 마련의 꿈은 장기전세주택 입주때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서울에서도 집값이 싼 편에 속하는 은평뉴타운 전용면적 85㎡ 아파트의 매매가는 이미 6억원을 넘어섰다. 미분양이 많았던 2010년에 3억원 가량으로 집을 샀으면 두배의 시세차익을 올렸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마포나 공덕으로 이사 가고싶지만 현재 보증금으로는 집을 사는 것은 고사하고 전세를 얻기도 힘들다.

올 들어서 A씨는 주요 아파트 분양단지에 청약을 넣고 있지만 당첨은 요원하다. 3년 전 집안 일로 급전이 필요해 10년 동안 넣었던 청약저축을 해약했던 게 발목을 잡았다. 당시만 해도 1순위 자격만 확보하면 일부는 추첨으로 입주자를 선정했기 때문에 해약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2일 정부가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을 내놓으면서 전용면적 85㎡ 이하를 전부 가점제로 공급키로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청약저축 해약으로 청약가점 10점을 날린 것이다. 수차례 아파트 청약에 떨어지면서 그렇게 날려버린 10점이 너무 아쉬웠다. 정책 변경라는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다가왔다.

“장기전세주택의 장점에 매몰돼 내집 마련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자산 증식의 중요한 시기를 놓쳐버렸다는 게 후회됩니다. 이제야 내집 마련에 관심을 갖고 준비 중이지만 갈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정리=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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