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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대 회사원 김모씨 부부는 지난해 4월 서울 화곡동의 1억80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계약 1년여가 지난 올 4월 김씨는 집주인이 잠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동산경기 침체로 전셋값이 떨어지고 매매거래가 얼어붙자 세입자 수백명의 전세금을 돌려주기가 힘들어진 집주인이 국외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집주인은 서울·경기에 가진 전셋집만 280여채라고 했다.

#2 서울 신월동 한 빌라 입구에는 ‘전세금을 돌려 달라’는 편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편지의 수신인은 서울 강서구·양천구·구로구 일대에 집 600여채를 가진 주택 임대사업자로 올초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강서구 일대 주택 1000채 소유 갭투기자를 처벌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지난 16일 기준 5867명이 청원에 참여한 상태다. 피해가 확인된 사례는 100여명. 하지만 지금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아 앞으로 피해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차액(Gap)만 투자해 세입자가 사는 동안 집값이 오르면 팔아서 시세차익을 얻는 행위. 부동산 호황 때 유행하던 ‘갭투자’가 최근 집값과 전셋값 하락으로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서울뿐 아니라 경기 동탄신도시, 경남 창원에서는 집을 192채, 270채 가진 갭투자자가 법원에 개인회생제도를 신청했다. 경북 경산과 대구 달서구에서도 수십채 규모의 피해가 확인됐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일부 피해자는 집주인이 매매한 금액보다 수천만원 높은 전세금을 내고 살았다. 아파트와 달리 빌라나 원룸 등은 세입자가 시세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비아파트의 불투명한 가격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집주인이 집을 팔아도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는 데다 심지어 팔리지 않는 집을 보유하자니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앞으로 갭투자자 잠적사태는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서민 청년·신혼부부

예컨대 갭투자는 집값이 1억원인데 전세금 9000만원짜리 세입자가 사는 집을 1000만원만 내고 명의 이전받는 투자다. 주로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적은 저가주택이 피해 대상이 된다.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최대 피해자가 대부분 주거취약계층, 즉 경제적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피해지역을 봐도 지방이나 서울 외곽의 집값이 싼 동네다. 또 가격이 1억~2억원대로 낮은 빌라나 원룸 등에 사는 세입자가 주로 피해를 입었다. 세입자들 나이도 20~30대 청년과 신혼부부가 주를 이룬다. 1억원대 자금으로 전셋집을 구할 수 있는 집이 적다보니 전셋값이 싼 동네의 저가 빌라 등으로 몰려들고 가뜩이나 전재산인 전세금을 통째로 떼이게 된 것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총 2515건의 분쟁조정 신청 중 1801건(71.6%)은 전세금 반환과 관련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중 실제 조정이 이뤄진 경우는 1125건(44.7%)에 그쳤다.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는 집주인이 조정절차에 응하지 않거나 의사 통지를 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된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2016년 집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세입자가 분쟁조정 절차를 개시할 수 있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국은행의 ‘최근 전세시장 상황 및 관련영향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올 1~2월 전국 아파트 중에 전셋값이 직전 계약 시점인 2년 전 대비 하락한 곳은 절반 이상인 52.0%에 달했다. 지방의 전셋값 하락 비중은 60.3%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최근 가격하락이 시작돼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다양한 대안 있지만 해법 아냐

이번 사태는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한 지난해 말에 예견됐다.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추가금액 없이 집의 명의를 이전받아 달라’는 집주인이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속출했다. 세입자로선 집값 하락에 따른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최후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이마저 선택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 예정이거나 임대주택에 당첨된 경우,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해야 하는 경우 등이다.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분양대금이나 임대주택 보증금을 치를 수가 있는데 연쇄 피해가 불가피한 것이다. 또 전세자금대출이 있는 경우 은행이 강제로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 집에 하자가 있는 등의 사례도 적지 않다.

전세기간 종료를 앞두고 집주인과 연락이 안될 경우 세입자는 우선 만기 한달 전까지 계약서상 집주인의 주소로 재계약 거절에 대한 내용증명을 보내야한다. 반송될 경우 주민센터에 임대차계약서와 내용증명을 지참해 방문하면 집주인의 실제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만기까지 결국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땐 관할법원이나 대법원 인터넷등기소를 통해 임차권 등기명령을 신청해야 한다.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은 집주인 의사와 관계없이 설정이 가능하다. 임차권 등기명령이 설정되면 세입자는 이사 후에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가질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경매를 진행해야한다. 1년여의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데다 전세금 대비 낙찰가율이 낮은 데 따른 손해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정부는 관련피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세보증보험 가입자격을 완화하고 보험 가입규모를 확대하는 조치를 부랴부랴 시행했지만 이미 피해를 입은 경우 구제방법이 될 수 없다. 게다가 한푼두푼이 아쉬워 싼 전셋집을 찾는 서민에게는 보험료 부담도 커 쉽지 않은 방법이다.

이번에 잠적한 갭투자자들은 정부의 세제혜택을 받으려고 주택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경우도 상당수인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의 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실태조사와 보호대책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선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대출규제 완화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행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은 무주택자 40%, 1주택자 0%다. 2주택자 이상은 전세금 반환 목적이라도 대출이 금지된 상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위기 때는 세입자 피해를 막기 위해 전세금 반환 목적인 경우만 대출을 허용해줬다”면서 “피해가 확산될 경우 대책이 필요해보인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02호(2019년 7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김노향 기자 merr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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