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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인생살이, 고추보다 맵다.
-굽이굽이 돌아가도 또 한고비 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이었지만 햇살도 보통 따가운 여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여름도 내년을 기약하면서 또 가나 봅니다. 그냥 가기가 아쉬운지 막바지 매미소리가 찢어질듯 울리고, 새색시 연지처럼 가녀린 코스모스 사이로 짝 잃은 벌 한 마리가 잉잉거립니다.

은행나무 밑에는 냄새 고약한 은행 알이 힘없이 툭~ 떨어집니다. 또 가을이 왔구나! 세월속의 숨바꼭질이 허무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팔청춘도 아니고 갱년기도 아닌 늙은 부부는 집안에 빠져있는 머리카락이 서로 당신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늙은 마누라는 잠도 없는지 밤에 보면 부엌에 있고, 새벽에 보면 마루에 있습니다. 마누라 손등에는 오늘따라 저승꽃이 더 선명해 보입니다. 젊은 시절 이유 없이 구박했던 양심에 쬐끔 가책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뭘 그렇게 하느냐? 고 물어봤더니 떼거리로 몰려올 손자와 손녀들에게 줄려고 식혜도 만들고, 물김치도 담고, 송편 만들 것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짱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을지라도 무쇠 같은 사람이기에 또 일을 시작하나 봅니다.

“우리 며느리들은 게장만 보면 환장을 하는데 게 값이 비싸서 으짜꼬 잉?”
“한우 갈비는 못 사더라도 엘에이 갈비라도 사야 할 텐디?”
가끔 손끝으로 허리를 지근지근 하기도 하고, 한숨도 쉬어 가면서 엉덩이 붙일 시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나는 살기 힘들어도 자식들 앞에서는 결코 표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는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에게는 주고 싶은 마음이 또 슬슬 도지는 모양입니다. 자식들에게 퍼주면서 한평생을 늙었건만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 게 부모마음인가 봅니다.

나는 나대로 손녀들이 2-3일 자고 갈 침대와 침구도 정리해 놨고, 손자들이 뛰면서 사용할 침대와 이브자리도 다 준비해 놨습니다. 컴퓨터도 서로 싸우지 않게 하려고 노트북까지 3대를 다 준비해 놨습니다.

웬수 같은 명절은 왜 쉬지도 않고 찾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자식도 명절만 되면 찾아오곤 하니 명절 때는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나이든 사람들은 더 피곤합니다.

며느리에게 “얘야, 더 쉬었다 가거라.” 그런 말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피곤하듯이 저도 피곤할 테니까요. 굽이굽이 돌아가도 또 한 굽이가 남아있는 게 인생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살기가 좀 어려운가요. 며느리도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질 것입니다.

-믿고 따른 죄밖에 없는데 왜들 저런대요?-

늙은 마누라는 자나 깨나 텔레비통을 보듬고 삽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던 마누라는 뭣이 마음에 안 찬 듯 혼잣말로 물어 옵니다.

“저 사람들이 서울시장에 나올랑갑소? 대학원장이라는 사람과 턱에 털난 사람 말이요?”
“우리네들은 믿고 따른 죄밖에 없는데 옛날 찍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엉뚱한 사람들이 나와서 설친당가?”

“대통령이 있는 당은 두 패로 나뉘어 4년 동안 삿대질만 했지라우? 또 다른 당은 청문회 때만 보이다가 노조 데모 때는 꼭 앞장을 섭디다. 나라가 우짤라고 이런대요?”
“이쪽도 찍어봤고, 저쪽도 찍어봤지만 다 똑같드구만”

“이번 추석에는 물가가 비싸져서 재래시장도 한 번밖에 못갔소. 전세 값만 올랐다고 하는디 차라리 우리도 전세 놓고 시골로 갑시다. 엊그저께 복덕방 여자가 그러드만요. 전세는 올랐어도 시세는 옛날에 비해 아직도 3억이 내려있다고… ”

“올랐어도 시원찮을 판에 3억이나 내렸으니 남은 세상을 어찌 산다요? 대출도 많이 들었담시롱, 참말로 큰일 이구만… 밖에 애들 오는갑소. 빨리 좀 나가보쇼. 오메~ 내 새끼들 오는갑네 잉~”

-세상살이, 인생살이 고추보다 맵다-

늙은 마누라 말이 다 맞습니다. 내리기도 많이 내렸지만 내린들 어찌하겠습니까? 내버려 둬도 부동산 시세가 더 내리는 일은 없을 터, 오르게 될지 옆걸음을 칠지는 아직도 과수댁 속옷입니다. 속옷이 빨간색인지 노란색인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부동산은 영원히 끝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돈이 풀린 만큼은 오를 것이기에 그저 인플레만큼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잠시나마 신경 쓰지 않기 위함이지요.

영원히 내려가는 길도 없고, 영원히 오르는 길도 없을 것이기에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세상이 요지경일 때는 부동산 우산이 안전하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60평생 험한 세상 살아왔을지라도 만일 집이 없었다면 명절 때 찾아오는 새끼들 어찌할까요? “집 없으니 돌아가거라. 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런데 근래 들어 늙은 마누라의 심정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마누라는 구강포라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었고, 거기서 바지락이나 고막을 캐면서 처녀 때까지 살았는데 그곳에 있는 점례라는 친구와 같이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살고 있는 주택은 팔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전세 놔 대출 갚고 그냥 몇 푼 쥐고 홀홀히 떠나자고 합니다. 결국 집까지 자식들에게 주고 가겠다는 뜻입니다. 나도 싫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는 날까지 나는 뛰어야 합니다. 고개도 넘고 물도 건너면서 굽이를 돌아야 합니다.

추석을 지나게 되면 또 어떤 굽이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돌고 돌아도 끝이 없는 인생굽이~ 그래서 인생살이와 세상살이는 고추보다 맵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며늘아, “어머님, 아버님 뭘 그렇게 많이 만드세요?” 라고 묻지 마라. 모두 너랑 네 새끼들 먹을 음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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