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동 오일달러의 습격]]
“엄마, 윗집 미경이네 엄마보고 애들이 과부라고 그러는데, 과부가 뭐야?
소위, 하늘아래 첫 마을 이라는 달동네에서 격동의 70년대 초반, 어린시절을 보낸 나는 종종 홀로된 동네 아주머니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 정부의 외화벌이 정책에 힙입어 우리나라의 많은 근로자가 오일달러를 벌기위해 사우디등 중동건설산업현장에 돈을 벌러 나가는 것이 그 당시 낮설치 않은 풍경이었다.
그 당시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함부로 그런소리 하면 큰일나’ 라고 하시면서 미경이네 아빠는 사우디에 돈 벌러 나갔다고 했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불우한 분들이 모이는 산동네이다 보니 미경이 아빠처럼 중동에 돈벌러 사는 경우도 있었고 실제로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되신 분들이 유독 많았다.
이듬해 봄, 필자는 난생 처음 피부가 까무잡잡한 미경이 아빠를 보았고 얼굴을 기억할 틈새도 없이 미경이네는 신장로에 집을 사서 동네분들의 부러움 속에 이삿짐을 꾸렸다.
[[주택시장 1차 급등기(70년대 말)]]
70년대 말 중동특수로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번 막대한 오일달러가 시중에 풀리고, 일부가 부동산에 유입되어 부동산가격이 급등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이에 놀란 유신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1978년 8월 ‘8․8조치’라는 것을 발표하여 비업무용토지에 대한 중과세와 양도세 중과 등의 조치를 취했고 곧이어 찾아온 1980년 경제위기로 곧 진정되게 되었다.
[[마지막 베이비 부머 세대 출연]]
"막둥아, 오늘은 왜 학교 안갔니?"
학교는 가지 않고 아침부터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어린시절의 필자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런말을 하면 어린 마음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 오후반인데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당시는 한 반에 2~3명 결석하는 것은 대수였고, 선생님도 한두명이 2~3일 가량 결석하는 정도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일주일 내내 얼굴이 보이지 않아야 물어물어 가정방문을 오는 정도였다.
일일이 집에 전화해서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에는 통장집 외에는 전화기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집에 연락을 하고 싶어도 신학기 가정 방문을 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연락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콩나물 교실에 60~70명이 땟국물 흘리며 빽빽히 공부하던 70년대,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떠밀리듯 학교에 다녔던 그 당시 오후반에 걸리면 필자는 몇일씩 학교를 빠지는게 대수였다.
수백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에 가지 않기로 작정한 그 당시 새벽 일찍부터 일터로 나가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보다 오전 내내 마을 어귀마다 나와계셨던 동네 아주머니들과 부딪치는게 어린시절의 필자에게는 큰 벽이었다.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건넬때마다 똑 같은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막둥아, 오늘은 왜 학교 안갔니?”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에 나가지 않은 이유를 들킨 필자는 어머님 손에 강제로 이끌려 선생님을 찿아 뵙고, 체벌대신 내가 점지한 짝꿍을 선택해 아무일 없듯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유달리 피부가 까만 우리 형제들이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피부색깔로 다른집 아이들과 우리형제들을 구별해 내곤 했다.
물론 형제들 중에서는 필자가 가장 하얀 피부였다고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오늘날 형제들끼리 거울을 보면 거의 ‘오십보 백보’수준이다. 필자 형님들 대부분은 소위 베이비 부머 세대이다.
70년대 우리 가족들은 부모님과 함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는데 돈이 없어 빈민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 주택난은 갈수록 악화된 것도 우리가족이 달동네에 자리잡은 한 원인이었다.
도시로 이사오자마자 셋방집을 얻을시, 위로 형님들이 유난히 많아, 어머님이 고생을 너무 하신 바람에 , 집을 흔쾌히 내준 예전 집주인을 어머님은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셨다.
국회의원 선거때만 되면 동네 반장이었던 어머니 때문에 , 통장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우리집에 직접와서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동네사람들과 잔치를 벌이곤 했다.
형제가 많아, 아버지 혼자벌이로 힘들어 오랫동안 어머니는 쥐포를 가공하는 바닷가부근의 가공공장, 집과 소규모 건물을 짓는 공사판을 목수,토수라고 불리우는 사람들과 수십년을 전전하셨다.
그 당시 일당으로 5천원을 벌고자 새벽에 나가셔서 ,밤늦은 시간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항상 저녁에만 어머니를 볼수 있었다. 공사판에서 제공해준 간식거리인 보름달과 앙코 단파빵을 자식들을 위해 드시지 않고 집에 가지고 오시던 그날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10살무렵 서울에서 놀러온 이웃집 친척에게 한입 얻어 먹어본 달디단 파인애플 한조각과 군대에서 휴가나온 큰 형님이 선물로 가져온 군용건빵과 종합과자선물세트 만큼이나 어린시절의 필자에게는 큰 기쁨중의 하나였다.
쥐포를 가공하는 바닷가일도 그다지 어린나이에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마치면 , 비누로 아무리 열심히 씻어도 가시지 않는 생선 비린내로 인해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발각되어 놀림당할까봐 얼마나 심장이 쿵쾅쿵쾅 했는지 모른다.
10살 무렵 한창 사춘기로 예민했던 시기, 더구나 좋아했던 여자애가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어, 바닷가일을 끝내고 다음날 학교가는 날은 더욱더 조마조마했다.
[[80년대, 베이비 부머들의 내집 마련시기]]
우리나라의 경우도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1955~1965 사이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 소위 베이비 부머 세대라고 일컽는다.1939년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막이 내린 1945 년 이듬해 태어난 세대가 속칭 미국의 베이비부머세대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구 비중을 살펴볼 때 한국은 미국,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출생연도가 △한국 1955~1963년 △미국 1946~1964년 △일본 1947~1949년인 사람들을 ‘베이비부머’로 통칭한다 2005년도 발표된 LG 경제 연구원 자료를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 29.3% △미국 29.4% △일본 27.8% 로 거의 대동소이하다.
‘한해동안 공기가 극도로 탁하고 안 좋으면 그 해는 단연코 솔방울 열매가 여느때보다 풍성하게 열린다고 한다. 어느 나라건 전쟁이 끝나는 그 이듬해에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많아 동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그칠 지 않았다.
[[주택시장 2차 급등기 (80년대 중반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주택가격이 다시 급등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다.
70대 중반 경기호황에 이은 80년대 초반 경기침체로 주택공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던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 불렸던 1980년대 중반은 '3저 호황'과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등의 국제대회 이후 집값도 덩달아 폭등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70년대 오일달러로 인한 1차 급등에 이어 2차 급등기가 찾아온 것이다.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라는 3저현상에 기인해 1986년부터 1988년 사이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섰고 경제성장률이 연 10% 수준을 기록했었다.
당시 ‘저금리’는 각국 정부가 제2차 오일쇼크로 불황에 빠진 경제를 부양시키려고 금리인하 노력을 펼치며 발생했고 국제금리가 떨어지자 우리나라는 외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변동금리부 외채의 상환부담이 줄어들었고 경상수지도 호전되었던 것이다.
아시안 게임이 열리던 연도인 1986부터 88올림픽이 개최되는 해까지 계속된 3저호황으로 국제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기록해 시중에 돈이 넘쳐나자 주택 공급부족과 맞물려 집값이 급등했다.
이때는 대기업들이 저리의 수출지원자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삼아 부동산투기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불만이 매우 높았다.
주택시장 2차 급등기에 ‘59년 돼지띠’인 큰형님의 결혼식이 있었고 막내였던 필자는 흑산도홍어를 비롯한 진귀한 음식들을 모처럼 맛볼수 있었던 한해였기도 했다.
큰형님이 결혼하던 그 당시, 전국의 집값이 3저호황과 더불어 베이비부머들의 결혼시즌에 맞춰 급격히 상승한 휴유증으로 집을 구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었다.
대다수의 젊은 부부들은 잠결에, 연탄집게를 사용해 연탄을 갈아야 하는 지하셋방이나 옥탑방에서 힘겨운 생활을 한참동안이나 해야만 했고, 연탄까스라도 마시는 날이면, 동치미 국물을 가득 마시고 출근해야 했다.
당시 6공화국 수장인 노태우 정권이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포함한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할때까지 집값불안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분당, 일산을 비롯한 신도시가 입주한 95년까지 수도권 집값도 하향안정세가 계속 되었다.
"나는 주식보다 연금형 부동산이 좋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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