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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웅 교수 내 집 마련 경험담
필자는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그 시골에서 올챙이와 매미를 잡으며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4키로 정도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검정 고무신을 아끼려는 마음으로 거의 맨발로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골오지라 비행기는 가끔 보았어도 자동차는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어쩌다 괴물 같은 자동차 한 대가 시골길에 먼지를 일으킬 때면 달리기 잘하는 놈은 자동차 뒤에 매달려 공차를 타 보기도 했었는데, 자동차에서 늘 떨어지는 바람에 지금도 무릎에 흉터가 보기 싫게 남아 있다.



뽕밭에서 금순이와 있었던 거시기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내 집 마련에 대한 경험담을 써보려고 한다. 맨발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결국 맨발로 청춘을 맞이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몸뚱이를 뒤집어 놓으면 달랑 두 쪽 그거밖에 없었다.



젠장, 누구는 어렸을 때부터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필자는 타고난 복이 없었는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으니 그 가난함을 말로 다 해 무엇 하겠는가. 초등학교 때부터 나무장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그 눈물겨운 빵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고 목이 메일 뿐이다.



제대복 입고 급한 마음에 공무원 시험 봤더니 덥석 붙었다. 장남으로서 노부모 모셔야 하고 거기에 딸린 동생들이 넷이었기에 멀리 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 했다. 박봉이었지만 자전거로 출퇴근했던 그때가 그렇게 좋은 시절이었음을 이제 새삼 느끼게 한다. 그때는 집 걱정, 교통걱정이 없었으니까,



그 당시는 산업화시대로 진입하는 1970년대 초였으니까 장남은 개도 안 쳐다보는 시절이었다. 더구나 쪽 째지게 가난한 집 장남에게 누가 딸을 주겠는가. 포기하고 있었는데 좀 덜 떨어진 여성 한 사람이 필자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므로 얼른 결혼을 해 버렸다. 그때 결혼을 아니 했더라면 내 집 마련은 엄청 늦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공무원 시험을 여섯 번 합격했었는데 마지막 발령장을 거머쥔 곳은 서울 어느 검찰청이었다. 이불보따리와 옷 보따리는 화물로 붙여놓고, 간단한 세간을 챙겨 완행열차에서 내린 곳은 영등포역이었다. 필자는 큰 아이의 손을 잡았고, 마누라는 작은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좀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뱃속에 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애들까지 줄줄이 사탕인지? 문래동으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할지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큰 애가 없어져 버렸다. 양손에 짐을 든 채 2시간 동안 찾아 헤매다보니 해는 서산에 기울었다.



애를 겨우 찾아 여인숙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뒤 월세방을 구하려고 이틀 동안 가장 값이 싼 봉천동을 샅샅이 뒤졌으나 필자를 받아 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데리고 있는 어린애 둘을 보는 순간 집 주인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새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다 가난한 어미와 아비 죄일진대 말이다.



하기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집주인 원망할 일은 아니다. 부잡한 네 살 배기와 세 살배기 남자 애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어미마저 또 배가 남산만 하게 나와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니겠는가? 아마 필자라도 마다했을 것이다.



가진 돈이 달랑 6,000원 뿐인지라(그 당시 필자의 월급이 9,000원 이었으니까 한 달 월급이 못 되는 돈이다) 월세 보증금이 적어 간곳마다 퇴짜를 맞고, 봉천동에서부터 시흥동까지 계속 밀려 내려가다가 결국은 안양까지 가게 되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안양 초입에 이르렀을 때 확 눈에 들어오는 동네가 있었다. 이태리식으로 지어 놓은 100여 가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잘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조건 내렸다.



옛날 말에 뺨을 맞더라도 금반지 낀 손에 맞고, 얻어먹더라도 잘 사는 동네에서 얻어먹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어느 길가 집 마당 한 쪽 수도 펌프가 있는 곳에 발길을 멈춘 후 애들에게 물을 먹이고, 필자와 마누라도 물을 한 바가지씩 마셨다.



우리 식구 넷 반은 껍질 없는 달팽이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월세방이 없느냐? 는 월세방 구걸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것이 집인데 집 가진 복을 타고 나지 않았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 바로 그 동네 그 집이 마을회관이었는데 방이 둘이고 부엌도 넓은 집이었다. 촌장으로 뵈는 어르신 한 분이 필자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셨는지 월세고 뭐고 필요 없으니 집이나 깨끗이 관리하라는 당부와 함께 거저 살라고 하셨다.



“1년을 살아도 좋고 10년을 살아도 좋으니 나갈 때는 꼭 집을 사서 나가시게~ 알겠는가?”

“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필자는 그 마을회관을 매일같이 수리하고, 다시 꾸미기를 수십 번, 철따라 페인트도 칠해주고 정원에 꽃나무도 심었다. 지붕도 바꿔주고 노인들이 쉴만한 자리도 마련해 놓았다. 마을회관이 늘 예쁘게 꾸며지자 주민들도 수시로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시장을 다녀오다 쉬었다 가면서 갈치 한 마리를 내놓고 가기도 하고, 쌀도 한 자루 내려놓기도 했다. 명절에는 쇠고기도 주고 가고, 조기도 몇 마리씩 주고 갔으며 애들 입히라고 옷가지도 주고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훈훈한 시골 인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집에 살면서 월세 한 푼 안 내고 먹을 것, 입을 것까지 무상조달 받고 산다면 기회는 바로 그때다. 어느덧 어린애는 셋이 되었다. 어린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내 집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철두철미하게 저축을 하였다.



도시에서 확실한 직장이 있고 고정수입이 있다면 내 집 마련의 길은 결코 멀지 않다는 확신으로 입에 풀칠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에 맡겼다. 은행 세 곳에 단돈 1만원이라도 나누어 적금을 했다. 은행을 분산시키는 이유는 나중에 한 곳에서 대출을 많이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밥상은 언제나 달랑 김치 한 가지~ 마누라도 재래시장 외에 그 어디에도 가본 일이 없다. 마을회관 주위에는 늘 동네 어린애들이 모여 줄넘기도 하고 뜀뛰기도 하는데 동네 어린이들은 당시 유행했던 ‘라면땅’이라는 과자를 즐겨 먹었다.



필자의 애들은 그 라면땅이라는 과자를 보게 되면 그게 먹고 싶어 하루 종일 징징거렸고, 과자 먹는 애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주지를 못했다. 그 일이 지금에 이르러 왜 이렇게 가슴을 후려 파는 아픔이 되고 있을까?



그 마을회관에 거주한지 2년6개월이 되었다. 부동산시장은 착 가라앉아 전혀 거래가 없을 때였다. 마을회관에서 계속 신세를 지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인지라 옳다! 기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입성을 하려고 3-4일 동안 영등포 남부지역을 둘러보았다.



가진 돈이 적기 때문에 전세 많이 나오는 집을 찾았다. 시흥동에 있는 신축 이태리식 2층 주택이 가장 좋은 조건이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계약해 버렸다. 당시 520만 원으로 기억되는데 그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지금 돈 5억2천정도 된다)



필자는 중개업소 사장님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의논한 결과 1층에 별도로 딸린 방 1칸과 부엌 하나는 필자가 사용하기로 하고, 2층을 통째로 전세 놓고, 또 아래층 일부를 전세 놓아 집값의 60%를 채우기로 했다.



나머지 40%중 20%는 거래은행 세 곳에서 적금대출을 받았고, 또 부족한 20%는 가지고 있던 현금과 차용금으로 채워 모두 정산을 마쳤다. 결국 내 집 사서 안방은 남에게 주고, 필자는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내 집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고, 내 집에서 출근하고 내 집으로 퇴근하는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등기권리증을 펴놓고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채 설레는 가슴을 쓰다듬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 해 냈구나 하는 그 마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그 후 땅도 사고, 집도 사고, 오피스텔도 사고, 상가도 사는 등 45회 정도 부동산매매계약을 체결해봤다. 남해안에서부터 파주. 김포까지 투자 해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돈을 번 것은 땅 투자였고, 대부분 개발예정지 투자였다.



필자가 운영하는 “21세기부동산힐링캠프” 카페 회원들은 50-70대들의 투자가 주류를 이룬다. 투자는 50세, 60세가 돼도 늦지 않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하지마시라. 나이 70됐다고 인생 포기하는 게 아니다. 돈 심는 곳에 돈이 나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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