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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중개에도 역사와 노하우 있어
공인중개사가 자격사로 대우를 받기 전인 30-40년 전에는 중개인이 운영하는 ‘복덕방(福德房)’이 있었다. 지금 60이상 노후세대들은 흔들거리는 중고 소파 2짝에 낡은 탁자 하나 놓은 복덕방에서 월세 방도 얻어 보고, 전셋집도 얻어 보고, 또 집이나 땅을 사보기도 하였으리라.



중개인들은 대개 은퇴한 고령자들이 하였는데 이게 수입이 짭짤해지자 젊은 층들이 대거 포진되기 시작하였고, 지방은 일정한 가게가 있지도 않았지만, 서울이나 대도시에는 사무실이 비좁으니까 이웃 다방을 이용해서 그곳에서 차를 마시면서 계약서를 작성하곤 했다. 미농지에 먹지를 끼워놓고 3통씩 작성하지 않았던가.



가게에서 커피는 마시지 않았고 이왕이면 비싼 것 마시자고 복덕방 사장이 목에 힘을 주면서 이웃 다방으로 데리고 가더라. 한복 입은 마담 몫까지 한 잔 더 주문하면 그 마담도 ‘그 집 좋다. 그 땅 좋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방 마담도 요즘 말로 ‘떳다방’노릇을 톡톡히 했다고나 할까?



따라서 복덕방에서는 매물만 보여주고 손님을 데리고 가서 진지하게 이야기 한 곳은 다방인줄만 아시라. 다방이 꼭 좋아서 간 게 아니라 사무실이 워낙 작고, 그때는 계약서를 필기하던 시절이라, 계약서를 작성할만한 책상도 없었기에 다방에 가서 차도 마시고 탁자에 앉아 계약서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계약이라는 게 워낙 큰돈이 움직이고, 그에 따른 매물감정이라든지, 권리분석, 법적인 문제까지 모두 처리해야 하는 종합백과사전적 일이므로 자격사로 하여금 담당하는 게 옳다고 하여 드디어 공인중개사가 시험제도로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요즘은 국민자격증이 되어 서민고등고시가 돼버렸다.



이제는 서민자격증이라고도 하고, 장롱자격증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험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오는 10월26일이면 30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있고, 수십만 명이 응시할 것이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되면 직업을 잃은 사람이 늘어나 응시생은 더 많아진다. 당신도 꼭 합격하시어 공인중개사가 되시라.



따라서 ‘복덕방’은 30년 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공인중개사 사무소이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한 공인중개사가 소정을 교육을 받은 후, 손해담보를 제공하고 영업을 한다. 중개업무도 많이 변했지만, 매물선택은 지하철과 가까운 역세권, 대형마트, 백화점, 편의시설 근처인 매물을 비롯해 아파트 토지는 물론, 전원주택까지 등장했다.



공인중개사를 끼지 않고 매도인과 매수인이 직접 만나 당사자간 계약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게 오히려 불편하고 법적문제가 일어나면 증인이 없어 어느 한쪽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기에 공인중개사 없는 부동산계약은 있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인중개사를 잘 만나야 한 텐데 어찌해야 할까?



부동산 부자들이나 부동산투자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미담을 들어보면 성공한 이유 중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밀어줬던 공인중개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도 공인중개사 덕으로 부동산투자에 성공한 사람이다. 부동산재테크를 하면서 세 사람의 공인중개사를 만났는데 모두 은인들이 되었다.



첫 번째 만난 복덕방 아저씨는 텁수룩한 전라도 아저씨인데 유머가 넘친 분이셨다. 1970년 초 양천구의 어느 새로 지은 단독주택을 권하면서 사라고 하였으나 자금이 모자라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렇게 저렇게 돈 맞추는 법을 제시하면서 마치 자기 돈을 주는 양 섬세하게 재무구조를 짜줬다.



그때 1,200만 원에 사면서 일부 전세를 안고 샀었기에 필자가 부담한 돈은 700만원 정도였다. 10년을 살다가 필자가 2000만원을 들여 2층을 증축했고, 다시 15년을 거주하다가 1995년경 3억에 팔았다. 그 3억 원은 서울에서도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수도권에서는 2채를 살 수 있는 돈이 되었다.



두 번째 만난 복덕방아저씨는 성질이 팔팔한 아저씨였는데 1975년 중반 강서구에 있는 새 집을 권유하였다. 매매대금은 1,100만 원이었다. 그 후 잠실 소형 아파트가 50-60만 원씩 했으니까 엄청 큰돈이다. 일부전세를 주어 10년쯤 보유하다가 1980년도 중반 1억 5,000만 원에 팔았다.



1990년대 초반 세 번째 만난 공인중개사는 가칠한 젊은 청년이었다. 인사를 하자마자 필자를 데리고 간 곳은 수도권 어느 자투리 땅 논을 권하면서 거저 가져간다 생각하고 사놓으라고 했다. 동네하고도 멀리 떨어진 못생긴 땅을 왜 사라고 했을까? 마음은 내키기 않았지만 워낙 값이 싸서 500만 원에 300평을 사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3년쯤 지나면서 동네가 커지고 길이 넓혀지더니 편의점 같은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고, 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 값은 1억을 주겠다고 한다. 500만 원이 3년 만에 1억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있는 후 그런 노하우를 믿고 3-4회에 걸쳐 필자가 직접 아파트 분양에 투자해봤으나 본전치기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상황판단을 잘 못한 것이다. 공인중개사에게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양심성과 또 하나는 선견지명이다. 당시 필자는 스스로 투자하는 일이라 그런 게 없었다는 것이다. 양심성과 선견지명~ 당신도 부동산투자를 하시려면 꼭 이걸 잊지 마시라.



양심성은 매매대금에 대해 고객 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돈으로 생각해야 하고, 선견지명은 그 지역이 나중에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의 중개를 담당했던 중개업소 사장님 두 분과 공인중개사 한 분은 모두 양심성과 선견지명이 탁월한 분들이셨다.



양천구와 강서구의 단독주택 2채는 모두 목동신시가지가 생기면서 크게 호혜를 입었었고, 토지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상업용 건물이 들어서면서 금싸라기 땅이 되어 각 많은 돈을 불려준 것이다. 이제는 필자가 중개사가 되어 중개를 한다. 양심성을 확인하고, 선견지명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중개가 시작되면 파는 손님 섭섭하지 않게 하고, 사는 손님은 나중에 크게 돈 벌어 노후 대비 잘하고, 자녀들에게도 부모의 은공이 미칠 부동산이 되기를 이 순간에도 기원해 본다. 부동산은 어차피 세월과 싸워 이겨야 하고, 그 싸움은 긍정적인 사람이 이기게 돼있으므로 오늘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선견지명을 지혜롭게 모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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