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면적 85㎡(=84㎡, 34평형)를 더 이상 국민주택으로 부르기 어려워졌다. 이제부턴 ‘부자주택’으로 불러야 할 지경이다. 요즘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에선 전세보증금 10억원을 준비해도 전용 85㎡를 얻기 어렵다. 보증금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사막에서 바늘 찾기처럼 물량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전용 85㎡ 매매가는 10억원을 넘은 지 오래다. 국민주택이 국민의 빈부격차를 더 벌려놓는 모습이다.
‘34평 10억(전세·매매)’ 아파트 수도권으로 확산 전세보증금 10억원 전후의 전용 85㎡ 아파트가 올해 서울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지역도 집값 비싼 강남에만 한정되지 않고 강북을 비롯해 서울 변두리 지역과 수도권 대도시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서울부동산정보광장 자료에 따르면 전용 85㎡ 기준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헬리오시티 전세가는 2018년 말 입주 당시 6억원에서 지난 8월 10억원을 훌쩍 넘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는 8월에, 강남구 개포동 래미안블레스티지와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는 10월에 각각 전세가 17억원을 기록했다. 강남구 대치동 대치SK뷰도 8월에 17억원에 육박하는 전세가로 거래됐다.
전용 85㎡의 전세가 고공행진은 서울의 강북 지역과 비(非)강남권으로 퍼지고 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래미안옥수리버젠은 7월에 9억원을 넘기 시작했다. 종로구 홍파동의 경희궁자이2단지는 7월에, 동작구 상도동의 e편한세상 상도노빌리티는 9월에 9억8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동작구 흑석동 아크로리버하임, 마포구 용강동 e편한세상 마포리버파크, 동작구 사당동 래미안이수역로이파크 등도 8~9월에 전세가 10억원으로 계약했다. 광진구 광장동 광장 현대홈타운11차도 9월에 11억원에 전세 거래됐다.
85㎡ 전세가 파동은 이젠 서울 변두리로 번지고 있다. 지하철 5호선 끝자락에 있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그라시움 전용 85㎡(84㎡A·B·C·D타입)도 7월 중순부터 전세 10억원에 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엔 전용 85㎡ 전세 대부분이 10억~12억원으로 상향 평준화됐다. 어쩌다 긴급 전세로 9억5000만원짜리가 한두 개 나올 뿐이다. 고덕지구에서 단지 규모가 고덕그라시움(4932가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고덕아르테온(4066가구)도 전용 85㎡ 전세가가 11월에 9억~10억원 수준을 형성하고 있다.
세입자 위해 만든 법이 세입자 괴롭혀 이에 편승해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일부 대도시에서도 10억원 넘는 85㎡ 전세 계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해까지도 없었던 현상이다. 9월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의 백현마을6단지는 10억원에,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푸르지오써밋은 11억원에 각각 전세 계약을 맺었다.
서울 고덕지구 G공인중개사무소 사장은 “고덕그라시움의 경우 지난해 전세가가 전용 85㎡는 5억~6억원대, 전용 59㎡는 3억~4억이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둘 다 두 배로 뛰었다”며 “전세가 폭등과 전세 물량 급감은 최근 3개월 안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원인으로 임대차 3법을 지적하며 “전세계약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자 부담을 느낀 임대인이 전세가를 한 번에 대폭 인상하거나 월세로 돌린 탓”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고덕지구 전체를 훑어도 전세 물건이 손에 꼽을 정도”라며 “몇 천씩 뛰는 전세가에 놀라 발길을 돌린 고객들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임대차 3법은 8월 1일부터 시행한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상한제, 2021년 6월 1일 시행 예정인 전월세신고제를 의미한다. 세입자를 위해 만든 법이지만 전셋값 인상과 전세 물량 급감을 부추겨 세입자를 괴롭히는 법이 됐다. 고덕그라시움 세입자 이모(50)씨는 “전세가 상승폭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버려 전세계약 갱신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한숨지었다.
고덕지구에 전세대란이 일자 2021년 2월부터 입주하는 고덕자이(고덕6단지 재건축 1824가구)를 두고 전세계약 전쟁이 한창이다. 전세가를 보면 전용 85㎡(84㎡A·B·C타입)는 8억~13억원대, 전용 59㎡는 6억~9억원대 수준이다. 고덕자이는 2018년 6월에 59㎡가 5억9500만~6억7070만원에, 84㎡가 7억5740만~8억20만원에 분양했다. “전·월세 계약이 대부분 이뤄져 지금은 끝물만 남았다. 11월 말 사전점검이 끝나면 또 오를 것”이라는 게 중개인의 설명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를 활용해 최근 3년(2018~2020년)간 9월 기준 수도권 아파트 전용 85㎡에서 보증금이 10억원을 넘는 전세 계약 건수(곳)를 추적해봤다. 그 결과 2018년 24건에서 2019년 25건, 2020년엔 46건으로 증가했다. 해당 아파트는 2018년엔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에만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엔 강남과 인접한 성동구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어 2020년엔 광진구·동작구·마포구·성동구·양천구 등지와 강북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전세가·매매가 고공행진 수도권으로 번져 보증금 10억원을 넘는 전용 59㎡ 전세 계약도 같은 기간 2건→3건→6건으로 늘어났다. 2018년엔 서울 서초구에만 있었지만 이듬해부턴 용산구와 강남구·송파구로 번졌다. 부동산정보 업체인 경제만랩 황한솔 연구원은 “85㎡ 문턱이 높아지자 59㎡로 수요가 몰렸기 때문”이라며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로 로또청약 대기수요 증가, 새 임대차법 여파로 전세 물량 감소 등이 전세가 상승을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매매 계약이 10억원을 넘는 아파트도 추적해보니 전용 85㎡는 같은 기간 212건→265건→359건으로 늘었다. 해당 아파트가 있는 지역은 2018년엔 강남구·중구·종로구·용산구·영등포구·양천구·송파구·성동구·서초구·마포구·동작구·광진구·강서구·강동구 등 대부분 서울이었다. 경기도는 수원시 영통구와 성남시 수정구·분당구, 과천시뿐이었다.
하지만 2019년 서울 구로구에서도 매매가가 10억원을 넘는 계약이 등장했다. 구로구는 금천구와 함께 집값이 서울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강남 집값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곳 신도림동에서 신도림2차푸르지오가 10억2000만원, 디큐브시티 10억3000만원, 대림e-편한세상4차 12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2020년엔 강북구·은평구·성북구·노원구, 심지어 금천구에서도 전용 85㎡ 10억원짜리 매매계약이 나타났다. 이 파장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화성시 청계동·오산동, 하남시 망월동·풍산동·학암동, 용인시 수지구, 안양시 동안구, 광명시 일직동·철산동·하안동, 고양시 일산동구 등 수도권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전용 85㎡ 전세가와 매매가가 10억원 넘는 계약이 2020년에 유달리 급증한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국토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1월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2008~2017년 3월)동안 3.3㎡당 2281만원에서 2625만원으로 344만원 정도 올랐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2017년 5월~2020년) 최근 3년 동안 상승폭이 1531만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이제 서울에선 주거전용면적 85㎡를 국민주택이라 부르기엔 낯부끄러운 상황이 됐다. 한국감정원 10월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 주택의 평균 매매가는 6억9998만2000원, 평균 전세가는 3억7436만4000원, 평균 월세가는 보증금 9845만3000원, 월세 96만5000원 수준이다.
최근 3년 집값 폭등 감당 한계치 넘어서 국민주택 기준은 1972년 제정된 주택건설촉진법에서 처음 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25평으로 정했는데 법정단위가 ㎡로 바뀌면서 85㎡로 변환한 것이다. 이 기준은 신혼부부 특별공급, 투기과열지구 가점제 공급, 국가·지방자치단체·지방공사의 공공분양주택 공급, 무주택 전·월세보증금 지원 등 여러 제도에 오늘날까지 관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주택시장이 악화되면서 중산층 보금자리라는 국민주택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있다. 게다가 인구 감소, 핵가족화, 1인가구 증가로 국민주택 기준을 줄이자는 의견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주택산업연구원 박홍철 책임연구원은 “국민주택이라는 의미에 비춰봤을 때 전용 85㎡ 전세가가 10억원을 넘는 시세는 중산층이 감당하긴 어려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집값·전셋값 폭등은 임대차 3법 때문이다. 입주예정 물량이 최근 3년간 월평균 3만4000가구였는데 올해 11월에만 2만6000가구에 그치는 등 공급 부족도 주 원인”이라며 “정책이 수요와 공급 균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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