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정책은 투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7년 6월 23일,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 취임사)
"투기 억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절대 지지 않을 것입니다."( 2020년 1월 7일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
"부동산 투기 근절과 재발 방지 대책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합니다." (지난 5월 14일 노형욱 국토부 장관 취임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직후 시작한 투기와의 전쟁이 4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고 있다. 전세는 더 불리해졌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전국 아파트값 상승률이 6.59%로 2002년(12.02%) 이후 최고다. 2002년은 2000년 이후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른 해다. 최전선인 서울(5.6%)도 2000년대 들어 두 번째로 급등한 2006년(6.21%) 이후 가장 많이 올랐다.
문재인 정부 4년간 누적 상승률도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에 못지않다. 취임 후 4년간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이 노무현 정부 52.77%, 문재인 정부 46.44%다.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 상승률은 각각 41.03%, 42.21%다.
문재인 정부가 전선을 넓히고 기존에 나온 온갖 무기를 동원해, 화력까지 훨씬 높여 총공세를 펼쳤는데도 전쟁 목표인 집값 안정은 멀어 보인다.
▲ 올해 들어 아파트 값이 전국적으로 2002년 이후, 서울에선 2006년 이후 가장 많이 올랐다. 문재인 정부 4년간 역대 최고 수준의 '투기와 전쟁'을 벌였지만 역효과를 봤다. 사진은 서울 강남 아파트. 뉴스1
무주택자까지 투기 용의선상에 올라
정부는 집값 상승을 이끈 ‘주범’을 투기수요로 보고 규제를 집중했다. 김현미 전 장관이 취임사에서 집값 과열을 3주택 이상 소유한 사람이 주도했다며 다주택자를 집값 안정의 ‘적’으로 명시했다. 앞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다음 달 내놓은 6·19대책에선 다주택자 언급이 없었다.
다주택자 범위는 8·2대책에서 2주택 이상으로 넓어졌다. 1년여만인 2018년 9·13대책에서 ‘갭투자’가 투기수요에 가세했다며 1주택자도 압박해 대출을 조이기 시작했다. 갭투자는 전세 보증금을 끼고 주택을 매입하는 것을 말한다.
2019년 12·16대책에선 한발 더 나아가 무주택자 갭투자도 문제로 삼았다. 주택 보유 여부나 보유 주택 수에 상관없이 시가 15억원 초과 초고가 아파트의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금지했다. 1주택자도 더욱 조여 이전까지 '보유'만 따지던 양도세 감면 조건에 '거주'를 추가했다.
갭투자 규제는 정부의 투기시각 변화를 의미한다. 투기 기준이 보유 주택 수에서 거주 여부로 바뀐 것이다. 무주택자가 집을 사더라도 거주하지 않으면 투기다.
투기 범위가 넓어진 대신 정부가 보호하겠다는 실수요는 좁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무주택 서민, 신혼부부, 청년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실수요자의 부담을 완화하는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집 없는 서민·신혼부부·청년을 제외한 주택 수요가 투기수요이고 투기 용의자인 셈이다.
대출 금지 이어 사실상 주택거래 허가까지
문재인 정부 들어 청약·대출·세제 등 전방위 주택시장 규제가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나왔다. 규제 강도는 천장을 모르고 올라 다음 달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할 전망이다. 청약은 이미 유주택자가 발 디딜 틈을 없앴다.
분양받은 아파트를 최장 10년간 팔지 못하고, 입주 후 최장 5년간 온 가족이 들어가 살도록 했다. 재건축·재개발 등 도심 민간택지에서 전매제한 기간을 10년까지 늘리고 거주의무까지 도입했는데,이런 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처음이다.
대출 규제에서 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을 이전 최고 수준(각 40%)으로 올린 데 이어 7월부터 DTI보다 더 깐깐하게 상환능력을 따지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본격적으로 시행한다. 'LTV 0'(15억원 초과 아파트)을 만든 것도 현 정부다.
주택 취득에서 보유·매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의 세제를, 벌금인지 헷갈릴 정도로 강화했다. 3주택 이상과 다주택자에게 증여받은 주택의 취득세율은 12%다. 과거 ‘사치성 재산’으로 분류해 소유를 억제한 ‘고급주택’(아파트 전용 245㎡ 초과)에 해당하는 세율이다.
다음 달부터는 2018년 4월 이후 3년여 만에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세율이 또 오른다. 3주택 이상자 양도세 세율이 최고 75%에 달한다. 노무현 정부 때는 60%였다. 6월 1일 기준 소유자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부동산세도 현 정부 들어 두 번째로 올해 오른다.
버티기·풍선효과 등 역효과 양산
규제 범위를 넓히고 강도를 높였는데도 집값은 되레 더 많이 올랐다. '규제의 역설'이다. 이 정도면 규제가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다기보다 오히려 집값을 더 올렸다는 비판에도 할 말이 없다. 버티기,풍선효과 등 역효과가 더 컸다.
다주택자 주택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양도세·종부세 중과는 매물 잠김 효과를 낳았다. 주인들이 양도세가 아까워 팔지않고 버티거나 증여를 택했다. 다주택자 양도세가 3주택 이상의 경우 차익의 80%가 넘는다. 보유 기간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집을 오랫동안 보유한 다주택자일수록 ‘본전’ 생각이 강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정보사이트 아실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하루 평균 매물이 지난해 7만건에서 올해 5만건 이하로 30%가량 줄었다. 법원 등기정보를 보면 서울 집합건물(아파트 등) 증여 건수가 올해 1~4월 754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849건)보다 50% 넘게 급증했다.
정부가 입주 물량이 충분하다며 방심한 사이 매물 잠김이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물량의 부족을 심화시켰다.
전방위 규제를 패키지로 묶어 한꺼번에 적용하는 규제지역 ‘핀셋’ 지정은 풍선효과를 낳아 비규제 지역 집값을 자극했다. 규제 범위를 최소화겠다는 핀셋 규제가 계속 늘면서 규제지역보다 남은 비규제 지역을 핀셋으로 골라낼 정도다. 주택거래 ‘셧다운’이나 마찬가지인 토지거래허가구역도 마찬가지다.
서울사회경제연구소·한국경제발전학회가 지난 14일 개최한 공동 심포지엄에서 류덕현 중앙대 교수, 우석진 명지대 교수 등은 "핀셋 규제를 내세우며 부동산 시장을 미시 조정하겠다는 의지였으나 애초부터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였다"며 "정부를 포함한 누구도 핀셋 규제의 성공에 필요한 시장 구조와 시장 참가자의 행태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정책 입안자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능력을 벗어난 과욕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주택 매수자와 집값에서도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다주택자 매수가 줄자 1주택자와 무주택자가 집을 샀다. 국토부에 따르면 서울에서 다주택자의 추가 매수 비중이 2017년 13.8%에서 지난해 7.8%로 낮아졌다. 고가 주택을 누르자 중·저가 주택으로 수요가 옮겨갔다.
정부는 임대주택 등록과 계약갱신청구권 등 임대차법 등에선 앞뒤 맞지 않고 느닷없는 행태도 보여 반발을 샀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사방을 적으로 돌려놓고 틈만 나면 규제를 하는 식이어서 시장에 규제 피로가 쌓였다"고 말했다.
자녀 양육지침서 보라
집값이 뛰는데 정부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시장에 개입할 것이냐다. 전쟁을 치르듯 해야 할까. 전쟁은 상대의 부정이고 굴복이며 배타적이다. 불법에는 단호히 대처해야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며 집을 사는 매수자를 투기꾼으로 몰 순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는 저서 등에서 집값 과열을 가져오는 ‘야성적 충동’을 다룰 때 국가는 자녀 양육지침서에서 말하는 부모 역할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부모는 너무 엄해도, 너무 관대해도 안 된다. 지나치게 엄하면 당장은 복종해도 나중에 반항한다.
그러고 보면 현재 주택시장은 고압적인 부모 아래 엇나가고 반항하는 자녀를 닮았다. 미운털 박힌 다주택자는 학대를 당하는 심정일 것이다. 로버트 실러 교수는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 자유를 줄 뿐 아니라 야성적 충동으로부터 보호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가정의 달 5월이 가기 전에 오락가락하고 걸핏하면 불같이 화를 내다 권위와 신뢰를 잃은 '꼰대' 부모의 모습이 아닌지 되돌아보는게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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