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동산은 글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의 부동산(不動産)이 아니다. 부동산 시장의 주류인 주택에 이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틈새상품’이 들썩이며 몸값이 치솟고 있다. 초저금리로 잔뜩 불어난 유동성이 주택시장에 집중된 규제 장애물을 피해 흘러든다. 소유권 없이 세입자로 살 수 있는 권리에 불과한 임차권도 돈이 된다.
분양가가 시세보다 수억 원 저렴한 ‘로또’ 분양 뺨칠 정도로 틈새상품 청약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생활숙박시설’이 가장 뜨겁다. 내부 구조가 호텔 등 일반적인 숙박시설과 달리 취사 등 생활이 가능한 아파트를 빼닮았다. 바닥 난방이 되고 주방·발코니 등이 있다.
지난달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분양한 롯데캐슬르웨스트가 최고 6049대 1, 평균 657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876실 모집에 신청 건수가 57만여 건이었다. 청약 사흘간 건당 200만원인 청약신청금으로 1조1500여억원이 몰렸다.
부산시 부전동 서면푸르지오시티시그니처, 충북 청주시 가경동 흥덕구 힐스테이트청주센트럴 등 지방에서도 경쟁률이 600~800대 1에 달했다.
경기도 용인시 보정동에 짓는 84㎡(이하 전용면적) 아파트인 수지구청역 롯데캐슬하이브엘이 지난 2일 22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상당한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로또 분양 단지가 아니다.
이 아파트는 입주 후 10년간 거주할 임차인을 모집한 민간임대주택이다. 앞서 대전시 신탄진동 동일스위트리버스카이2단지, 경기도 평택시 안중역지엔하임스테이 등의 경쟁률도 100~200대 1이었다.
▲ 부동산 시장의 유동성이 커지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이 규제 문턱이 낮은 '틈새상품'으로 쏠리고 있다. 서울 남산N서울타워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뉴스1
오피스도 청약경쟁률 고공행진에 합류했다. 지난달 서울 강동구 고덕아이파크디어반(590실 모집)의 경쟁률이 최고 411대 1, 평균 32대 1이었다. 사무실로 쓸 수 있는 37~296㎡ 규모의 업무시설이다.
부동산 틈새상품이 달아오르는 것은 물론 풍부한 유동성 때문이다. 상품 투자성을 좌우하는 요인은 환금성이고 거래 제한 규제가 큰 걸림돌이다. 주택은 대개 분양권 상태에서 전매제한을 받은 데 비해 이 상품들은 전매가 자유롭다. 수지구청역롯데캐슬하이브엘과 같은 민간임대주택은 공공지원 민간임대와 달리 임차권 거래에 제한이 없다.
김규정 한국자산신탁 자산승계연구소장은 “전통적으로 임대수익형으로 꼽히던 상품들이 시세차익형 상품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생활숙박시설 등 분양권이나 임차권에 많게는 1억원이 넘는 웃돈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8월 분양한 인천시 송도 힐스테이트송도스테이에디션 생활숙박시설의 웃돈이 최고 2억300만원이다. 업계에 따르면 1년 새 3분의 1 정도가 전매됐다.
수지구청역 롯데캐슬하이브엘 임차권도 계약과 동시에 웃돈이 1억8000만원까지 형성됐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임차인이 나중에 분양전환(소유권 이전) 받을 가격이 주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할 것으로 예상해 웃돈이 생겼다”고 말했다.
생활숙박시설과 임대주택 인기는 주택 공급 부족의 반사이익이 크다. 정부가 생활숙박시설의 주거용을 금지하겠다고 하지만 생활숙박시설이 주택 인정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많다.
실제로 정부는 한시적이나마 생활숙박시설을 사실상 주택인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급등하는 아파트 가격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투자수요를 끌어당기고 있다.
해운대해수욕장 옆 주거복합단지에 국내 최고층 아파트인 엘시티와 함께 2019년 들어선 생활숙박시설인 엘시티더레지던스가 4개월 새 27억여원 올라 거래됐다. 지난 4월 초 29억6000여만원에 팔린 205㎡가 8월 초 56억9000만원에 주인을 바꿨다. 엘시티 186㎡ 시세가 45억원 선이다.
명품 효과도 있다. 용도를 떠나 랜드마크(지역 대표건물)로 희소가치가 큰 부동산은 돈이 넘쳐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안전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윤성 미드미네트웍스 상무는 "부동산시장에서도 고급스러운 럭셔리 상품이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고덕 아이파크디어반 꼭대기층에 들어서는 분양가 최고 39억원인 펜트하우스(204~296㎡)가 평균의 10배가 넘는 400대 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주택과 비주택의 경계가 없는 젊은 세대의 주거 트렌드도 한몫하고 있다. 생활숙박시설·오피스 등은 주거 기능을 충분히 갖출 수 있어 일과 주거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발코니도 갖추고 평면 구조가 아파트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주택보다 가벼운 세금도 메리트다. 주택 분양권 양도세의 경우 세율이 보유 기간 1년 미만 70%, 1~2년 60%다. 하지만 오피스·생활숙박시설 등 분양권은 각 10%포인트 낮다. 임차권은 부동산을 취득할 권리가 아니어서 분양권 과세 대상에서 빠져 있다. 준공 후 생활숙박시설·오피스를 주택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종합부동산세가 없고 주택 수에서 제외돼 조정대상 지역의 다주택 양도세·종부세 중과 적용을 받지 않는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본래 기능의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너무 올라가면 가격에 거품이 낄 수 있다”며 "시장이 과열되면 정부 규제가 강화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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