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임차인을 구하는 전세 물건이 쌓이면서 서울 전셋값 상승세가 꺾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 7월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를 골자로 한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사라졌던 전세 물건이 다시 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선 전세 물건이 늘면서 전셋값 상승세도 주춤하고 있다. 압구정동
케빈부동산 김세웅 대표는 “수요는 없는데 전세 물건만 나오니까 호가(부르는 값)도 주춤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이를 두고 “전세시장이 안정되고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새 임대차법에 따른 수요-공급의 미스매치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연구기관들도 내년에도 전세난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서울 아파트 월세 비중 역대 최고
부동산 빅데이터업체인 아실에 따르면 시장에 나온 서울 아파트 전세 물건은 17일 기준 3만1592가구다. 시중 전세 물건이 2만 가구를 넘긴 것은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1년여 만이다.
서울 아파트 전세수급지수도 2년 2개월여 만에 100 이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2월 둘째 주(13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수급지수는 98.5로 전주(99.1) 이후 2주 연속 100 이하였다.
이 지수는 100보다 낮으면 수요보다 공급이, 높으면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정부는 시장이 안정세라고 평가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입주 물량 증가, 대규모 정비사업 이주 종료 등으로 지난해 8월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최다 매물이 출회되고, 가격 상승세도 지속해서 둔화하는 모습”이라고 밝혔다. 수요가 줄면서 전세 물건이 쌓이고 있는 만큼 전셋값은 더 내릴 것이라는 예측이다.
케빈부동산 김 대표는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공급이 달렸는데 최근 갑자기 수요가 뚝 끊겼다”고 말했다. 중계동 을지부동산중개업소 서재필 사장도 “가을과 비교하면 전세 물건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계절적 비수기인 데다 새 임대차법으로 전세 수요의 이동이 일시적으로 멈춘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지난해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계약갱신권을 써 재계약하는 사례가 늘면서 전체적으로 전세 수요의 이동이 멈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능력시험 이후 강남·목동 등지를 빠져나가려는 수요가 생기니 일시적인 수요-공급 미스매치 현상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대출 규제, 보유세 강화로 아파트 매매가 끊긴 것도 원인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전세시장은 매매시장과도 연동돼 있다”며 “보유세 강화, 대출 규제 등으로 아파트 매매가 끊기면서 이사 수요가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을 정부의 판단대로 ‘안정세’로 접어들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당분간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 물건 증가로 전셋값이 약세를 보일 수 있겠지만, 이 같은 현상이 오래갈 것으로 보는 이는 드물다.
내년 8월이면 새 임대차법 시행 만 2년이 지나 갱신청구권을 활용해 재계약한 임차인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상황이 또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존 임차인들이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쇄 이동을 시작하면 최근의 수요-공급 역전 현상은 또 다시 역전할 가능성이 있다.
박 전문위원은 “계약갱신권을 활용했던 임차인은 4년 만에 신규 계약을 하게 되는데, 전셋값은 4년 전에 비해 두 배”라며 “신규 계약에 나설 기존 임차인이 느끼는 전세난은 수치상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낙관하지 말고 전월세 대책 세워야
이 때문에 주택산업연구원·대한건설정책연구원 등 주요 연구기관도 전셋값 상승세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특히 내년 전셋값 상승세가 올해와 유사한 6.5%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은 “계약갱신권 만료 후 전세시장이 더 불안해질 가능성이 높아 전세의 월세화 현상이나 월세가격 상승세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월세 관련 지수도 이미 역대 최고치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서울 아파트 월세지수는 108.6으로 2015년 12월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후 최고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임대차시장에서 월세가 낀 거래 건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체 임대차 거래 중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도 36.51%에 이른다. 전셋값 급등으로 자의반 타의반 월세를 사는 사람이 크게 는 것이다.
이들은 보증금 마련을 위한 전세자금대출 이자에 월세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정부는 전세 물건이 조금 늘었다고 상황을 낙관하는데 지금은 낙관할 게 아니라 전월세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한편, 지방에선 아파트 청약시장 열기가 빠르게 식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이달 들어 청약을 진행한 지방의 민간 분양 아파트 30개 단지 중 15곳이 순위 내에서 모집 가구 수를 채우지 못했다.
특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완판’ 행진을 이어가던 대구에서는 이달 들어 청약 접수를 받은 5곳 중 4곳이 순위 내에서 미달했다. 경남·경북·전남·전북 등지에서도 청약 미달 사례가 나오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2월 둘째 주 지방 아파트의 매매수급지수는 98.6으로 지난해 10월 이후 1년 2개월 만에 100 이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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