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율(시세 대비 공시가격 비율)을 2020년 수준으로 낮춘다. 문재인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만들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집값이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시세가 공시가격을 밑도는 아파트가 잇따르는 데다, 올해 종합부동산세 부과 대상자(122만명)가 5년 새 4배 규모로 불어난 것을 의식한 조치다.
전문가들은 “사실상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폐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국토교통부는 22일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2차 공청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조정안을 발표했다. 공시가격은 정부가 과세 등을 위해 매년 1월 1일 기준으로 감정 평가를 거쳐 정하는 평가가격이다. 재산세·종부세와 건강보험료 등 60여 개 행정제도의 기준 지표로 활용된다.
이 자리에서 ‘공시제도 개선을 위한 전문가 자문위원회’ 소속 유선종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자문위원)는 “실거래가와 공시가격의 역전, 과도한 국민 부담 증가, 가격 균형성 개선 차원에서 현실화율을 20년 수준으로 환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아파트 단지의 모습. 연합뉴스
조정안에 따르면 내년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공시가 현실화율은 평균 69%로, 올해(71.5%)보다 낮아진다. 9억원 미만 아파트에 적용하는 현실화율은 68.1%, 9억∼15억원 미만은 69.2%, 15억원 이상은 75.3%다. 올해보다 9억원 미만은 1.3%포인트, 9억원 이상은 5.9%포인트씩 낮아진다.
당초 공동주택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은 내년엔 72.7%로, 2030년까지 90%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2020년 11월 도입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에 따라서다.
그런데 올 들어 집값 하락세가 거세지자 기존 현실화 계획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이에 국토부의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지난 4일 공청회에서 내년 공시가 현실화율을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불과 18일 만에 다시 손질한 것이다. ‘집값은 내려가는데 세금은 더 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다.
실제 금리 인상 여파로 올해 1~9월 수도권 아파트 실거래가는 10.5% 하락했지만,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올해 17.2% 뛰었다. 공시가격 아래로 가격이 내려간 아파트도 속출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전용면적 76㎡ 1층 물건의 올해 공시가격은 19억3700만원인데, 지난달 말 19억850만원에 팔렸다.
지난해 9월엔 26억9000만원에 거래된 아파트다. 여기에다 올해 종부세 납부 대상자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서울에 집을 가진 사람 5명 중 1명(22.4%)이 종부세를 내야 하면서 조세 저항 우려까지 나왔다.
유 교수는 “최근 부동산 시장 상황이 내년까지 이어질 경우 공동주택 일부에서 나타나는 역전 현상이 단독주택·토지까지 확대될 수 있어 현실화율을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조정안에는 단독주택과 토지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2020년 수준으로 되돌리자는 내용도 담겼다.
이에 따르면 단독주택은 올해 58.1%에서 내년 53.6%로, 토지는 71.6%에서 65.5%로 낮아진다. 국토부는 이 조정안을 대부분 받아들여 이달 중 공시가격 현실화율 수정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원종훈 KB국민은행 WM투자자문부장은 “내년도 재산세와 종부세는 공시가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만큼 올해보다 줄어들 것”이라며 “현실화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9억원 이상 아파트가 수혜를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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